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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한국의 아침 햇살과도 같은 추상을 그리다
장준 석(미술평론)
한국미술에 추상회화가 들어온 지 벌써 반세기가 넘었다. 대략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추상 미술은 현대 미술의전위 역할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따라서 주지하다시피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작가들이 추상 미술을 하였으며붐이 일어날 정도로 뜨거울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예전 같은 분위기만은 아니어서, 현대 미술의 흐름에 역행한다고 여겨졌던 구상주의적 미술이 다시금 부상하게 되면서 추상 미술은 상대적으로 더욱위축되어가는 느낌이다.
이처럼 추상 미술의 기세가 한풀 꺾이면서 국내에서도 추상미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예술가들이 많아지고 있다. 추상 미술은 일반인들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미술전문가들까지도그 깊이감을 식별해내기가 쉽지 않다는 특성 때문에 유명 대학 학력이나 대학교수 등의 레테르로 현혹시켜 작품을 과대 포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와 무관하지 않은 듯, 추상미술이 국내에서 붐을 이루던 당시에도일부에서는 추상 화가들이 대체적으로 감성적인 측면이 부족하거나 구상주의적 그림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작가들이라며 비아냥거렸다. 필자 또한 추상미술을 선도했던 국내 명문대학교 원로 교수의 작품을 보면서도 감성적인 미감을 충분히 느낄 수없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국내의 추상주의적 작가들의 작품을 많이 보아왔지만, 깊이감이 있는 추상작품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추상주의미술은 구상과 달리 오히려 고난도의 감성과 감각이 필요한 예술적 장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필자는 오로지 작품성 하나만으로도 작가적 역량을 인정 받아가는 김홍태의 보기 드문 추상 미술에 주목하여 왔다. 그의추상 작업은 국내의 여느 추상 작가의 그것과는 각도가 다르며 감성이 풍부하면서도 수준이 높다. 이는아마도 그가 그림 그리기를 즐길 뿐만 아니라 타고난 예술적인 끼와 예리한 눈이 남달라 대단히 예민한 부분까지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인 듯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작업에 대해 매우 진지하며 작품을 위한 장인정신과 예술가적 노력 또한 대단하다. 그런 면모는 그의 작업실에서 작품에 대해 몇 번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감지되곤 했다. 그의 작업실은 여느 추상 작가의 그것과는 달라서, 마치 구상주의작가의 작업실처럼 대단히 깨끗하고 편하다. 거기에서는 남의 이목을 의식하여 펼쳐놓은 듯이 허우대만 커다란작품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남을 의식하지 않으면서 진지하고 심도 있게 몰입하는 게 그의 추상 작업의강점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심적 수양을 위해 명상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으며 훌륭한 작품을위해 부단히 자신을 낮추고 인내한다. 또한 그는 많은 작품을 보려고 노력하며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듣고자 한다. 그리고 외국에 나갈 기회가 있으면 좋은 작가들의 도록과 책을 구입하여 발전적이면서도 비판적인시각에서 숙지한다. 또한 김홍태는 감성적인 느낌을 풍부히 작품으로 형상화할 수 있는 예술적인 감각과예리한 눈을 지녔다. 그에게는 작품의 시작, 중간, 끝을 정확히 감지할 수 있는 예리함이 있어서 작품이 마무리 될 시점에서는 정확하게 끝맺음이 된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그림이 살아 숨 쉬도록 생동감 있게 표현하기 위한 깊이감 조절을 자유자재로 하는 능력을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서 회화성이 풍부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남다르게 예리한 감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는타고난 감각이나 감성에만 의존하지 않고 관객들이 감상하면서 생각할 수 있는 정적이고 명상적인 작품을 창작하고자 한다. 그의 작품의 화면 한 부분에는, 마치 세상의 시원을 좇는 듯한 알파와오메가적인 요소들과 모든 만유의 귀결을 이루는 작은 원형의 형상이 있는 듯 없는 듯 자리하고 있다. 서양화이면서도지극히 한국적인 요소들을 함축한 듯한 그림들은 ‘고요한 아침’을떠올리게 한다. 게다가 우리나라 선사시대의 대표적인 암벽 그림인 반구대 암각화에서 느낄 수 있는 원시적인투박함마저 있어서 구수한 맛이 흐르면서도 세련되어 정갈스럽기조차 하다. ‘항상 그림을 그릴 때 빛이오는 것과 같은 느낌을 생각한다.’ 는 그는 아마도 우리의 고요한 아침 햇살과도 같은 은은한 빛을 마음에품었는지도 모른다. 김홍태의 작품에는 요소마다 독실한 기독교인다운 면모가 녹녹하게 녹아있다. 아이처럼 순수하면서도 자유분방한 선들 속에서 군데군데 한데 어울리는 숫자3217은 하나님의 실체인 삼위일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가끔 툭툭 던져지듯 들어가있는 노랑 빨강 파랑은 성부, 성자, 성모를 상징적으로 표현한것이다. 서로 다른 색의 흐름들이 부드럽게 섞이면서 조화를 이루는데,자연스러운 반추상적인 형태와 자유분방한 선들은 서로 보완이 되기도 하고 거부감 없이 한데 어울린다.마치 반구대 암각화처럼 선각의 형태로 긁혀진 자유로운 선들이 무정형적으로 자연스레 흩어지기도 하고 결합되기도 하면서 마음에 다가오는것은 그의 순수한 선율에서 나오는 알 수 없는 형상의 힘이다.
이처럼 알 수 없는 미묘한 형상의 힘은아마도 그의 자유분방하고도 순수한 심성에서 비롯된 듯하다. 중국의 대철학자 이탁오는 훌륭한 그림에는반드시 아이 같은 마음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삶의 생명성이 담겨있는 그의 작품들은 지극히인간적이며 딱딱하거나 경직되어 있지 않다. 이는 그가 아이 같은 고운 심성으로 회귀하여 따사로운 빛의영감을 받으며 작업하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순수하기에 그의 캔버스에는 보라, 파랑, 노랑, 청회색, 푸름, 주홍빛 등 다양한 색들이 마치 빛의 향연을 이루 듯 은은하게스며있다. 이러한 색의 향연, 빛의 향연은 화면 밑으로부터자연스럽게 배어나와 기독교적 향기를 발하는 듯하다. 이질적인 요소들이 하나로 하모니를 이루며 고요하게흐르는 것은 기독교의 삼위일체와도 같다. 수잔 랭거가 말하는 기호적 상징성들이 하나의 회화로 생명성을띤 채 광활한 우주의 한 공간을 끝없이 흐르듯이, 김홍태의 작품에서는 다양한 원인자들이 살아서 숨 쉬며그 자태를 은근히 뽐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작가 김홍태는 어느 때 어느 곳에서 만나도 아이처럼부드럽고 순수하지만, 작품에 대해 이야기할 때만은 모든 에너지를 표출하는 듯 열정적이기만 하다. ‘그림 화면 안에서 난 여행을 하는 기분’이라는 작가 김홍태의 예술가적심성이 이제 어느 방향으로 흐를 지는 예측할 수 없다. 다만, 타고난그의 감성은 우주 자연의 섭리와 하나가 되어, 아침 햇살처럼 신선하게 영글어가며 아름다운 작품으로 형상화될 것이다.